그런데 선생이 부리던 비복의 충성과 기지로 원은 죽음을 면하고 무사히 자라 후사를 잇게 된다. 금부도사가 선생의 집으로 들이닥쳐 가솔들을 끌어갈때 마침 원과 비슷한 어린애를 기르던 여종이 자신의 아이와 원을 바꿔치기 하여 살려 낸 것이었다. 그 뒤 단계 선생의 충절을 기린 검제의 안동 권문이 종의 품에서 장성한 원을 사위로 맞아들여 선생의 후사를 잇게 했는데 그가 자리잡은 곳이 바로 검제 초입에 있는 솔밤 마을이었다.세계는 오직 비극의 무대이고 삶은 고통일 뿐이라고 믿는다면 자녀의 생산을 거부할 수도 있다. 그것은 세계관의 문제이며 낭가서는 철학의 문제이다.인생의 실상이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는 확증이 없는 이상 그 믿음과 거기 따른 선택의 시비의 대상이 되지못한다.김천은 영남의 허리가 되는 땅이나 심한 전란으로황폐해져 있었다. 관아와 민가는 불타고 문서와 사람은 흩어져 모든 게 두서가 없었다.운악공은 밤낮으로궁리하여 무너진 것을 일으키고 흩어진 사람을 모았다. 또 백성이 입은 병화를 헤아려 그 상처를 어루만지고 이속들의 기운을 돋워주니 차츰 아래위의 손이맞고 김천을 떠나 여기저기 흩어다니던 사람들이 되돌아왔다.후부인은 송나라 낙양의 사람으로 정향의 부인이요정자 명도 선생과 이천 선생 형제분의 어머니 되시는분이다. 성풍과 행실이 단정하고 학식이 높았으나 사장을 숭상하지 않고 법도로 자식을 가르쳐 형제를 나란히 명현으로 길러내셨다. 특히 명도 선생은 세상사람들에게 맹자 이후 오직 한 사람이라일컬어 졌으며, 아우인 이천 선생도 학문의 정밀함과 깊이가 형에 뒤지지 않아 흔히 형제가 이정으로 묶이어 불리운다.이 몸이 죽지 못함은 다만 늙으신 어머님께서 살아 계심이라.그러더니 그해 늙으신 어머님이 돌아가시자 성복을 지내고 바로 순절했다. 비록 나라에서정문을 세워 그 정렬을 표했으나 며느리도 자식이라어버이 된 마음에 어찌 애통함이 없겠는가. 이미 육순을 넘긴 연세로 단 네 해동안 두 아들과두 며느리를 앞서 보낸 이에게 무슨 바람이 더 남을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운악공께서는
자기 성취 내용을 특수하면서도 그 가치가 사회적승인을 받을 수 있는 업적으로 한정짓는다면 남성에게도 그런 자기 성취는 흔한 일이 아니다. 빼어난재능과 노력으로 남들이 다 인정할 만한 성취를 이루는남성은 많아야 백에 하나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그런 자기 성취를 못한 것이 불행이라면 그것은여성만의 것이 아니다.하지만 거기에도 내 선택은 있었다. 예와 이치만으로는 진심으로 웃어른을 우러르고 받들 수가 없다.그날은 제사 음식 만드는 것을 도와드리고 제사 때는 뜻 밖인 내가 넙죽히 절을 하면서 많이 귀엽게 보아주시고 내가 공부하는 뜻을 꼿 이루게 해달라고 빌지 마지 않았다. 제사 차리는 초닷새는 내 생일이니할머니 덕분에 잘 지내게 되어 잊지 못할 생일이 되었다^5,5,5^그러자 생각은 다시 내가 이미 했던 선택과 성취쪽으로 돌아왔다. 이 선택과 성취가 세상에 내놓을생산도 오래전부터 널리 그 가치를 인정받아 온 것들이다.나는 조선 선조 31 년 왜장 소서행장이 그 마지막무리를 이끌고 이 땅에서 쫓겨나기 하루 전인 동짓날스무나흗날 안동 서쪽 20리쯤 되는 검제에서 태어났다.다른제도에서와 마찬가지로 그 목적과 기능을 이념화하게 되면서 점차 개인에 대한 억압 구조로서 모습을드러내기 시작했다.어쩌면 그날 내 눈길을 끈 것은 한 그루 자미화의기이한 자태가 아니라 그 나무와 내가 앞으로 그 일원이 될 가문의 쓸쓸하면서도 끈끈한 인연이었는지도모른다. 그것이 어떤 예감으로 마음 한 자락을 건드려 내 눈길을 그리로 끌었음에 틀림이 없다.그리고그 예감이 어긋나지 않았음은 며칠 안 돼 시아버님운악공의 말씀으로 밝혀졌다. 그날 신행 사흘 만에방간으로 내려간 내가 무슨 일인가로 안마당을 지나는데, 창두(노비)들로 하여금 밤 사이에서러진 그자미수 밑둥을 짚으로 싸게 하고 계시던 시아버님이나를 부르셨다.그때 나는 한창 나이 열여섯이었다. 세상이 알아주는 경당 선생의 외딸이요 재주있다는 소문에 용색이반드시 추루한 것도 아니어서 사방에서 혼담이일었다.벼슬이라고 할 수도 없는 하찮은 자리였으나